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쓰는 작업은 보통 감상에서 시작한다. 장조는 밝게, 단조는 어둡게 받아들이거나, 노래 제목과 가사에서 인물과 사건을 가져온다.
이번 실험은 그 반대로 출발했다.
음악의 제목과 가사, 분위기를 전부 무시하고 오직 음표에서 기계적으로 나온 문자만으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여기서 음악은 이야기의 주제가 아니다. 문자를 생산하는 장치다. 작가는 곡을 해석하는 대신, 음표가 만들어 준 제약 안에서 문장을 찾아야 한다.
배경에 피아노가 있는 펼쳐진 책
1. 처음에는 기존 곡을 쓰지 않으려 했다
아이디어의 최초 형태는 단순했다.
음표 → 숫자 → 문자 → 이야기
처음에는 제목과 가사의 영향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무작위로 만든 16음 멜로디를 쓰는 방안도 검토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음악을 변환한다는 실험의 긴장감이 약해진다. 이미 존재하는 곡에는 작곡가가 선택한 실제 음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을 다음처럼 다시 정했다.
기존 곡을 사용한다.
곡의 제목·가사·작곡 배경은 이야기 소재로 사용하지 않는다.
밝다거나 슬프다는 식의 음악적 정서도 서사에 반영하지 않는다.
음표에서 정해진 공식으로 생성된 문자만 이야기의 제약으로 사용한다.
이 조건에 맞는 첫 원자료로 바흐의 BWV 846 첫 8마디를 선택했다. 이 곡에 가사가 없다는 점은 편리했지만, 중요한 것은 무가사가 아니었다. 곡의 이름과 관습적 해석을 실제 창작 규칙에서 제외했다는 점이었다.
2. 음표를 어떻게 문자로 바꿀 것인가
악보 데이터는 music21 내장 코퍼스의 bach/bwv846.mxl을 사용했다. 첫 8마디에서 새로 연주되는 음의 공격만 추출했다.
악보에는 한 음이 길게 유지되면서 박자 경계에서 타이로 나뉘어 기록된 경우가 있다. 이를 새 음으로 다시 세면 실제 연주 순서와 다른 문자가 생긴다. 따라서 타이의 stop과 continue는 중복 계산하지 않았다.
변환 규칙은 다음과 같다.
음표
→ 국제 표준 MIDI 번호 n
→ ((n - 1) mod 26) + 1
→ 1=A, 2=B, …, 26=Z
예를 들어 첫 마디는 다음과 같이 변환됐다.
단계
결과
음표
C4 E4 G4 C5 E5 G4 C5 E5 C4 E4 G4 C5 E5 G4 C5 E5
MIDI
60 64 67 72 76 67 72 76 60 64 67 72 76 67 72 76
문자
HLOTXOTXHLOTXOTX
첫 8마디에서는 마디마다 16개씩, 모두 128개의 문자가 생성됐다.
HLOTXOTXHLOTXOTX
HJQVYQVYHJQVYQVY
GJOVYOVYGJOVYOVY
HLOTXOTXHLOTXOTX
HLQXCQXCHLQXCQXC
HJNQVNQVHJNQVNQV
GJOVAOVAGJOVAOVA
GHLOTLOTGHLOTLOT
이 문자열은 뜻을 가진 암호문이 아니다. 문자 각각을 이야 기 속 단어의 첫 글자로 사용한다.
3. 왜 영어로 먼저 썼는가
생성된 문자가 A부터 Z까지의 알파벳이므로, 제약을 가장 직접적으로 지키는 방법은 영단어의 첫 글자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규칙은 엄격하게 잡았다.
문자 하나당 단어 하나를 쓴다.
문자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
어려운 문자가 나와도 건너뛰지 않는다.
마디 하나를 16단어 문장 하나로 만든다.
8마디를 8문장, 총 128단어로 완성한다.
첫 마디에서 요구되는 단어의 첫 글자는 다음과 같다.
H L O T X O T X H L O T X O T X
최종 문장은 이렇게 됐다.
Helena left ordinary traffic; Xander opened three x-rays, hiding luminous outlines that xerographically overlaid temporal x-rays.
한국어판은 독해를 위한 번역이다. 한국어 번역문 자체에는 알파벳 첫 글자 제약을 적용하지 않았다. 제약 원문과 독자용 번역의 역할을 분리한 것이다.
4. 첫 초안은 규칙을 통과하지 못했다
사람이 문장을 읽을 때는 자연스러움에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 단어 수가 많아지면 첫 글자 하나쯤 어긋나도 쉽게 지나칠 수 있다.
실제로 첫 초안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Helena left ordinary traffic; Xander opened three x-rays, hiding luminous outlines that exposed other timelines, inexplicably.
문장만 읽으면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첫 글자를 추출하자 결과는 달랐다.
기대값 HLOTXOTXHLOTXOTX
첫 초안 HLOTXOTXHLOTEOTI
13번째 단어는 X로 시작해야 했지만 exposed의 E로 시작했다. 16번째도 X가 필요했지만 inexplicably의 I가 들어갔다. 두 위치가 규칙을 어겼다.
xtotox라는 한국 앱의 스크린샷
이 실패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오탈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실험에서 문자 순서는 장식이 아니라 작품을 성립시키는 원자료다. 문장이 더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문자를 바꾸면, 더 이상 음표에서 파생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실패를 감으로 고치지 않고 자동 대조 결과에 맞춰 교정했다.
실패: that exposed other timelines, inexplicably
교정: that xerographically overlaid temporal x-rays
교정 후 첫 글자는 정확히 다음과 일치했다.
HLOTXOTXHLOTXOTX
5. 최종 이야기는 음악의 내용과 무관하게 태어났다
생성된 문자열에는 Q, V, X, Y처럼 영어 문장의 첫 글자로 자주 쓰기 어려운 문자가 반복됐다. 이 제약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초현실적인 방향으로 밀어냈다.
최종 번역본의 줄거리는 이렇다.
헬레나는 평범한 교통의 흐름을 벗어난다. 잰더가 펼친 엑스레이 사진에는 시간의 단층 위로 겹쳐진 빛의 윤곽이 숨어 있다. 떨리는 일기장과 벌어지는 지하 금고, 환풍구 주위를 도는 보랏빛 실, 오래된 환영과 이름 없는 채석공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유리병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중력이 바깥쪽으로 뒤틀린다. 방문자들은 여러 개의 답을 들고 나타난다. 마지막에는 중력이 멈추고 언어가 시간을 추월한다.
끝에는 오직 진실만 남았다.
이 이야기에는 바흐, 전주곡, 건반 연주, C장조의 정서에 관한 내용이 없다. 음악에서 가져온 것은 오직 음의 순서가 강제한 문자 배열뿐이다.
6. 검증은 어떻게 했는가
최종 검증은 이야기만 따로 세지 않았다. 악보에서 문자를 다시 생성하고, 이야기에서 단어 첫 글자를 다시 추출한 뒤 두 배열을 직접 비교했다.
악보에서 음표 공격 추출
→ MIDI 번호 변환
→ 알파벳 문자열 생성
→ 이야기의 단어 첫 글자 추출
→ 마디별 문자열 비교
검증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검증 항목
결과
사용 마디
8마디
마디별 새 공격음
16개
전체 음표 공격
128개
생성 문자
128개
제약 원문의 단어
128개
마디별 문자열 일치
8/8
전체 문자열 일치
PASS
각 마디의 결과도 모두 exact match였다.
M1 HLOTXOTXHLOTXOTX PASS
M2 HJQVYQVYHJQVYQVY PASS
M3 GJOVYOVYGJOVYOVY PASS
M4 HLOTXOTXHLOTXOTX PASS
M5 HLQXCQXCHLQXCQXC PASS
M6 HJNQVNQVHJNQVNQV PASS
M7 GJOVAOVAGJOVAOVA PASS
M8 GHLOTLOTGHLOTLOT PASS
7. 이 실험에서 배운 점
음악은 의미가 아니라 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
음악을 문학으로 바꾸는 방법이 꼭 감상이나 번안일 필요는 없다. 음높이·순서·길이·쉼을 숫자로 바꾸면 음악은 새로운 형식 제약을 제공한다.
제약은 표현을 막는 대신 예상하지 못한 방향을 만든다
Q, V, X, Y가 반복되자 평범한 현실소설을 쓰기 어려워졌다. 대신 엑스레이, 지하 금고, 환영, 시간의 단층 같은 이미지가 생겼다. 이는 곡의 분위기를 해석한 결과가 아니라 문자 분포가 만든 압력이었다.
자연스러운 문장과 규칙 준수는 별개의 품질이다
첫 초안은 읽을 만했지만 규칙을 위반했다. 제약문학에서는 문장 교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원자료와 결과물 사이의 기계적 대응을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번역본과 제약 원문은 구분해야 한다
한국어 번역까지 같은 알파벳 제약을 유지하려 하면 의미가 크게 손상될 수 있다. 그래서 영문 원문은 생성 규칙을 보 존하고, 한국어판은 독자의 이해를 담당하게 했다.
8. 아직 남아 있는 한계
이번 변환식은 단순하고 재현하기 쉽지만 음악 정보 전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음의 길이는 반영하지 않았다.
쉼표와 강약은 반영하지 않았다.
화음이 동시에 울리는 경우의 별도 서사 규칙은 아직 없다.
MIDI 번호를 26자로 순환시키는 방식은 특정 문자를 과도하게 반복시킬 수 있다.
xerographically,yearward,vaultward처럼 제약을 맞추기 위한 비일상적 어휘가 생겼다.
이 한계는 실패라기보다 다음 실험의 설계 지점이다. 예를 들어 음높이는 자음, 음의 길이는 모음, 쉼표는 문장부호로 대응시키면 한국어 전용 체계도 만들 수 있다. 다만 규칙을 복잡하게 만들수록 이야기 작성 전에 변환표를 먼저 고정해야 한다. 결과를 본 뒤 유리하게 규칙을 바꾸면 실험의 의미가 약해진다.
9. 재사용 가능한 실험 절차
다른 곡으로 같은 실험을 하려면 다음 순서를 사용할 수 있다.
사용할 곡과 마디 범위를 먼저 고정한다.
제목·가사·음악적 배경을 창작 입력에서 제외한다.
어떤 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셀지 정의한다.
음표→숫자→문자 변환식을 결과를 보기 전에 확정한다.
생성 문자열을 공개하거나 별도 파일에 보존한다.
문자 하나당 단어 하나처럼 이야기 제약을 명시한다.
초안을 쓴 뒤 단어 첫 글자를 자동 추출한다.
악보 파생 문자열과 이야기 문자열을 전수 비교한다.
불일치는 숨기지 않고 실패본과 교정본을 함께 남긴다.
번역본이 제약 대상인지 독해용 파생본인지 구분한다.
맺음말
이 실험에서 음악은 이야기의 배경음악이 아니었다.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암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128번의 음표 공격을 통해 128개의 문자를 내놓았다.
그 문자들은 다루기 쉬운 재료가 아니었다. 어떤 문자는 지나치게 반복됐고, 첫 초안은 두 곳에서 규칙을 어겼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단어와 이미지가 등장했다.
창작의 자유는 아무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때로는 바꿀 수 없는 문자 128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열어 준다.
이번 결과는 음악을 설명한 이야기가 아니다. 음악이 남긴 구조를 통과해 태어난 이야기다.
검증 범위와 한계
이 글의 수치와 PASS 판정은 music21 내장 악보에서 추출한 첫 8마디와 실제 128단어 영문 원문을 자동 대조한 결과에 근거한다. 한국어 번역은 독해용 파생본이므로 알파벳 첫 글자 제약의 검증 대상이 아니다. 대표 이미지는 개념 설명용이며 악보의 정확한 음형을 재현한 도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