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해주는 비서, 동료는 정작 뭘 시킬지 몰랐다 — 그래서 메뉴판을 걸어줬다

종이 더미 옆에 서있는 남자�와 로봇

"루나야, 이것 좀"은 잘 통하는데, 정작 "그래서 뭘 시킬 수 있냐" 는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01 소개 — 동료 앞에서 입이 안 떨어진 날

지난 글에서 소개한 '스스로 자라는 비서' — 저희 회사 슬랙에선 루나라는 이름으로 일합니다.
유튜브 영상을 분석해 리포트를 쓰고, 이미지를 그리고, 주간 보고 초안을 잡고, 업무 보드에 할 일을 올리고… 메뉴판에 올리려고 목록으로 쭉 뽑아 보니, 47가지나 되더라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굴리면서, 정작 몇 가지나 하는지는 저도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옆자리 동료가 제 화면을 보더니 물었어요.
말문이 막혔습니다. 채팅창은 그냥 텅 빈 입력칸이거든요. 동료 입장에서는 이게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조차 물어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적힌 흰색 종이

자신 있게 답하려는데 입이 안 떨어졌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이 고작 "음… 일단 아무거나 시켜보세요?" 였거든요.
채팅창엔 텅 빈 입력칸뿐이라, 어떤 일이 되는지조차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똑같이 물어보며 시작했고요.

그날 깨달았어요. 루나는 주문할 줄 아는 단골이 저 하나뿐인 가게였구나. 뭘 시킬 수 있는지는 저만 — 그것도 가끔 까먹으면서 — 알고 있었던 거죠. 동료들에게 47가지 기능은 사실상 0가지였습니다.

한 남자가 부엌의 로봇 앞에 서 있다

주말에 급한 대로 Claude Code를 시켜 웹 메뉴판과 주문서를 만들어 봤는데, 처음 든 생각이 이거였어요.
"이거… 손님은 못 시키는, 보여주기용 가게 같다." 주문서를 내면 "슬랙 가서 확인하세요"라며 화면이 끊기고, 주문한 음식이 조리 중인지 식어버렸는지 알 길이 없고. 오히려 채팅보다 귀찮았습니다.

이번 주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동료에게 권할 수 있는 가게"가 될 때까지 끌어올리기.


02 진행 방법 — 나는 기준만 정하고, 만드는 건 Claude Code

가게 단장은 전부 Claude Code에게 맡겼습니다. 화면 만들기, 고치기, 다듬기까지요. 대신 제가 정한 건 기준 세 가지뿐.

  1. 가짜 데이터 금지. 화면의 모든 숫자와 기록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 쓴다 — 그럴듯하게 채워 넣는 순간 또 '보여주기용'이 되니까요.

  2. 어설프면 다시. "이만하면 됐다"며 적당히 멈추지 않고, 기준을 넘을 때까지 다시 시켰어요.

  3. 결정은 위임. 디자인이나 세부 구현은 묻지 않게 했어요 — 저는 결과만 봅니다.

여기서 요령 하나만 공유하면 — 다 만든 AI에게 "어때, 괜찮아?"라고 물으면 항상 괜찮대요. 자기가 만든 거니까요. 그래서 '어설픈지' 판단은 제작에 끼지 않은, 결과만 처음 받아 본 또 다른 Claude에게 채점을 맡겼습니다. 남의 작품처럼 보니까 가차 없이 깎아주거든요. 덕분에 저는 밤새 들여다보지 않아도 됐습니다.

한국어의 다양한 유형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03 결과 — 링크 하나면 권할 수 있는 가게


① 메뉴판 — 검색 한 줄이면 끝

메뉴판을 열면 맨 위에 지금 진행 중인 일부터 보이고, 그 아래가 검색창과 메뉴입니다.
"영상"이라고 치면 영상 분석 주문서가 바로 나와요. (화면엔 추천 메뉴만 추렸고, 전체 47가지는 검색으로 꺼내 씁니다.) 이제 동료에게는 긴 설명 대신 링크 하나만 보내면 됩니다.

한국어 텍스트가 적힌 휴대폰 스크린샷

한국어 문자 메시지 스크린샷

한국어 웹사이트 스크린샷

하나 눈에 띄는 게 있죠. 실패한 작업이 빨간 점 그대로 노출돼 있어요.
"작업은 완료됐지만 슬랙 전송에 실패했어요" 라는 사유까지요.
일부러 그렇게 뒀습니다. 잘된 것만 보여주는 현황판은 결국 아무도 안 믿게 되니까요.

한국 페이스북 페이지 스크린샷


② 주문 현황판 — 내 주문, 지금 주방 어디쯤?

제일 공들인 화면입니다. 배달앱도 내 주문이 "접수 → 조리 중 → 배달 중" 어디쯤인지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비서에게 시킨 일은 막연한 "처리 중…"이 전부예요. 지금 굴러가는 건지 멈춘 건지 보이질 않으니까요. 그래서 요청이 들어오면, 지금 어디까지 갔는지가 칸칸이 펼쳐지게 했어요 — 접수되고, 위험한 요청은 아닌지 한 번 걸러지고, 실행되고, 마지막에 결과가 떨어지기까지. 그중 접수실행 두 칸을 펼쳐 볼게요. (거르기는 접수 화면의 안전 규칙으로, 결과는 실행 칸 마지막에 이어져요.)

여기 진짜 주문 하나로 보여드릴게요.
"루나가 오늘 배운걸 이미지로 만들어줘" 라고 시킨 건인데 — 무엇을·어떤 스타일로·어떤 비율로 주문했는지가 접수 칸에 그대로 남고, "외부 발송·삭제·발행은 승인 후 진행"이라는 안전 규칙이 자동으로 붙습니다.

한국어로 된 문자 메시지의 스크린샷

핵심은 다음입니다. '실행' 칸을 열면, 그 한 칸 안이 다시 여러 단계로 펼쳐져요.
루나가 거친 단계가 1번부터 차례로 찍혀 있고, 도구를 쓴 단계엔 그때 쓴 도구가 함께 남습니다. 자기만의 요령(스킬)을 거듭 꺼내 보고, 그 사이 지난 대화와 파일을 뒤졌어요. 명령창도 한 번 열어 봤고, 마지막엔 결과물이 제대로 나왔는지 만든 이미지를 직접 들여다봤죠. (1번 '생각 정리'처럼 도구 없이 지나간 칸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각 단계까지 흐른 시간도 진짜 기록 그대로 라는 점이에요. 이건 이미 끝난 주문이라 멈춰 있지만, 진행 중인 주문은 메뉴판의 "실시간 보기"에서 이 줄이 한 단계씩 늘어나게 해뒀고요.

화면에 나오는 한국 노래 목록
텍스트가 있는 컴퓨터 화면의 흑백 이미지

③ 단골 메뉴 — 자주 시키면, 비서가 먼저 알아챈다

이번 주는 단골 메뉴를 만드느라 이미지 생성을 반복해 시켰어요.
(덕분에 위 현황판도 이미지 주문으로 채워졌고요.)

그러다 제 슬랙 기록을 다시 보니, 저는 맨날 비슷한 걸 시키고 있더라고요.


단골집 사장님은 제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늘 드시던 걸로?" 하고 묻잖아요.
비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문이 완료될 때마다 횟수가 쌓이고, 쌓인 만큼 등급이 올라가게 했어요.

한 번 쓰면 새 메뉴 카드, 세 번부터 '자주 쓰는 메뉴', 여섯 번(또는 2주 안에 네 번)이면 단골 메뉴(루틴) — 이 사다리는 화면 맨 아래 규칙에 그대로 적혀 있어요.
실제로 이미지 생성을 거듭 시켰더니, 2주 안에 네 번을 채운 순간 루나가 먼저 제안을 얹었고, 지금은 완료 여섯 번까지 쌓였습니다.

실패한 요청은 등급에 안 쳐줘요 — 실패 네 번이 '단골 메뉴'가 되면 안 되니까요.

등급이 배지로 끝나면 장식이잖아요. 루틴이 되면 '루틴 등록' 버튼 이 생기고, 누르면 반복 실행 주문서가 미리 채워진 채로 열립니다. 주기만 적으면 끝 — "자주 하는 일 → 자동화 제안"까지 한 동선으로 이어지는 거죠.

물론 저만의 기능이 아닙니다. 동료도 몇 번 시키다 보면 각자의 단골 메뉴가 생기고, 루나가 먼저 알아봐 줍니다.

④ 주방장의 레시피 노트 — 배운 것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루나는 일하면서 스스로 배웁니다 — 제가 틀린 걸 바로잡아 주면 영구 규칙으로 남고, 자주 하는 일은 자기만의 요령(스킬)으로 만들어 쌓아둬요.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 쌓이기만 하던 이 기록도, 이렇게 꺼내 보여주는 화면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국 검색 엔진의 스크린샷

제일 위 요령은 11번 쓰는 동안 20번이나 다듬었네요.
그만큼 손이 많이 간 요령이라는 뜻이고, 이게 지난주 글에서 말한 '스스로 자라는' 부분이에요.
다만 자란 흔적도 이렇게 숫자로 남겨두지 않으면, 정말 자랐는지 저조차 알 수 없더라고요.


04 마무리 — 결국, 보이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번 주에 배운 걸 한 줄로 줄이면 이겁니다. 동료에게 권할 수 있는 도구의 조건은 기능 개수가 아니라 — 뭘 시킬 수 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메뉴판), 어떻게 되고 있는지 드러나고(현황판), 틀렸을 때도 솔직하게 보이는 것.
실패 기록까지, 그대로요.

필요했던 건, 이미 하던 일을 꺼내 보여주는 화면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동료의 첫 주문은 아직 안 들어왔어요 — 가게를 연 게 이번 주니까요.

그래도 하나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뭘 시킬 수 있는데요?" 라는 그 질문에, 이제 말 대신 메뉴판 링크로 답합니다. 😊

종이에 있는 문자와 숫자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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