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게 "연구 주제 정해줘"라고 안 했더니, 진짜 내 주제가 나왔다
소개 — 시도하고자 했던 것과 그 이유
저는 나노소재 분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AI 개발 쪽으로 커리어를 전환하려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자현미경(TEM), 전기방사, 보론나이트라이드 나노튜브 같은 걸 다뤄왔고, 논문도 여러 편 썼습니다. 그런데 막상 "AI를 접목한 새 연구를 해보자"고 마음먹으니, 시작점이 막막했습니다.
문제는 주제가 너무 넓다는 거였습니다. "탄소 나노 소재에 AI를 접목한다" — 말은 그럴듯한데, 이건 주제가 아니라 분야입니다.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이 아니죠.
처음엔 Claude에게 그냥 "이 분야 논문 10편 정리해줘"라고 했습니다. 잘 정리해주더군요. 그런데 정리된 걸 읽다 보니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남이 한 연구 요약본이 아니라, 나만 할 수 있는 연구 주제라는 걸요. 그래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내 정보를 줄 테니, 나한테 맞는 주제로 같이 좁혀보자"고요.
진행 방법 — 어떤 도구를 어떻게 활용했나
도구는 Claude(claude.ai) 하나만 썼습니다. 대신 한 번에 답을 받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번 주고받으며 주제를 깎아나가는 방식으로 썼습니다.
핵심은 첫 프롬프트 이후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주제의 폭을 좁혀 나만의 연구 아이디어가 중요할 것 같아.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를 접목시켜 주제를 더 좁혀보자.이 한 줄이 대화의 성격을 바꿨습니다. Claude가 답을 쏟아내는 대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강점을 중심에 두고 싶나", "데이터만 필요한 연구인가 실험이 필요한 연구인가", "장비 접근은 가능한가"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틀린 전제가 질문 덕분에 교정된 겁니다.
Claude는 제 배경 정보 중에 "4D-STEM 경험"이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주제를 밀었죠. 그런데 그건 제가 실제로 한 경험이 아니라, 예전에 지원하려다 만 연구직의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바로잡았습니다.
하나만 더 — 나는 아직 4D-STEM에 대한 경험은 없어.
지난번 지원하려던 포지션의 내용이야.
그리고 나는 Cryo-TEM 장비 구축 및 운영 경험이 약 3년 있어.이걸 정정하자 주제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잡혔습니다. Claude는 제 메모리를 수정해서 기억하게 했고, "그렇다면 진짜 강점은 Cryo-TEM 쪽"이라며 방향을 다시 짰습니다.
이런 식의 정정과 좁히기를 대여섯 번 반복했습니다. 매 단계마다 Claude는 2~3개의 선택지를 버튼 형태로 줬고(모바일에서 타이핑 없이 고를 수 있어 편했습니다), 저는 고르기만 하면 됐습니다. 좁혀진 경로는 대략 이랬습니다.
탄소 나노 소재 × AI (너무 넓음)
→ AI로 소재를 분석하는 방향 vs 소재로 AI 하드웨어를 만드는 방향
→ 전자현미경 영상을 AI로 분석하는, 아직 비어 있는 틈새
→ 내 실제 강점(나노소재 + Cryo-TEM 장비 운영)을 합친 "재료 Cryo-EM"
→ 1~2년 안에, 장비는 교섭으로 확보, 학계 복귀를 목표로
마지막엔 이 모든 걸 묶어 연구 계획서 초안까지 만들어줬습니다. 문제 정의, 방법론, 위험 요소, 단계별 산출물이 들어간 문서였습니다.
(이미지 첨부 권장) Claude가 선택지를 버튼으로 제시한 화면 캡처, 그리고 최종 연구 계획서 문서 캡처를 함께 올리면 과정이 한눈에 전달됩니다.
결과와 배운 점
배운 점과 꿀팁
가장 크게 배운 건 이겁니다. AI는 답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는 도구로 쓸 때 더 강력하다.
생각해보면 오늘 대화에서 정말 중요한 정보 — "4D-STEM은 내 경험이 아니다", "Cryo-TEM 운영 경험이 있다" — 는 전부 AI가 아니라 제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AI가 한 일은 그 정보를 꺼내게 만드는 질문을 던진 것뿐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처럼 "주제 정해줘"라고만 했다면, AI는 제 머릿속 패를 모른 채 그럴듯하지만 저와 무관한 주제를 줬을 겁니다.
꿀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정해줘"가 아니라 "같이 좁혀보자"라고 요청하세요. 전자는 AI가 추측으로 답하게 만들고, 후자는 AI가 질문하게 만듭니다.
둘째, AI가 가진 내 정보가 틀렸으면 즉시 바로잡으세요. 저는 4D-STEM 건을 정정하지 않았다면 엉뚱한 주제로 한참을 갔을 겁니다.
셋째, AI의 칭찬을 그대로 믿지 마세요. 이번 대화에서 Claude는 응원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강점은 둘인데 그게 하나로 안 합쳐진다", "당신이 고른 방향은 고위험이다", "이 계획서의 가장 약한 고리는 장비 접근이다"라고 분명히 짚어줬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솔직한 지적이 더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서 AI를 쓸 때 "내 약점도 솔직히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걸 권합니다.
시행착오
가장 큰 시행착오는 처음에 "논문 10편 정리"부터 시킨 것이었습니다. 결과물은 깔끔했지만, 그건 제가 진짜 원하던 게 아니었습니다. 한 번 헛걸음을 한 뒤에야 "내 정보를 접목해 좁히자"는 제대로 된 요청에 도달했습니다.
또 하나는, 주제가 대화 중에 여러 번 바뀐 것입니다. 처음엔 이게 비효율처럼 느껴졌는데, Claude가 짚어준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계획이 바뀌는 건 실패가 아니라 정보가 늘어난 증거라고요. 새 사실(Cryo-TEM 경험 같은)이 나올 때마다 방향이 정교해진 거였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부분
솔직히 말하면, 지금 손에 쥔 건 완성된 연구가 아니라 계획서 초안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의 가장 큰 변수는 "재료 Cryo-EM 실험을 할 장비에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가"입니다. 현재는 교섭으로 가능성이 있는 정도라, 이 부분이 풀리기 전까지 나머지는 가설입니다. 혹시 전자현미경이나 Cryo-EM 분야에 계신 분, 또는 학계 복귀를 비슷하게 준비해본 분이 계시면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다음 단계는 명확합니다. 재료 Cryo-EM을 하는 국내외 연구실을 조사하고, 제 계획과 방향이 맞는 곳 2~3곳을 골라 컨택하는 것입니다. 연구 자체보다 이 "장비 접근 경로 확보"가 먼저 풀어야 할 0단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병행해서 딥러닝과 기초 수학 공부를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번 경험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AI에게 길을 물어보러 갔는데, AI는 길을 알려주는 대신 제가 어디 서 있는지를 계속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답하다 보니, 길은 원래 제 발밑에 있었습니다.
도움 받은 글 (옵션)
이번 사례는 별도 참고글 없이, Claude와 의 대화 과정 자체를 정리한 것입니다.
대화 중 Claude가 검색해 인용한 학술 자료(전자현미경 딥러닝 노이즈 제거, 재료 Cryo-EM 관련 논문 등)는 연구 계획서 초안에 별도 정리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