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잘 쓴다는 건 뭘까 — 익숙한 일에 로나를 넣어보고 다시 깨달은 다섯 단계

0. 왜 하필 익숙한 일로

새 도구를 써 볼 때 제일 흔한 실수가 있다. 낯선 일에 새 도구를 쓰는 것이다. 그러면 결과가 좋아도 나빠도 그게 도구 덕인지, 일이 낯설어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했다. 눈 감고도 하는 일을 골랐다. 고객사에 보낼 회사 소개와 팀 코칭 레퍼런스 PDF, 그리고 그걸 첨부한 송부 메일. 영업 담당자라면 한 달에 몇 번씩 하는 일이다. 여기에 로나 코칭을 끼워 넣고, "AI를 잘 쓴다는 게 뭔지"를 한 번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7쪽짜리 PDF가 나왔고, 메일은 초안함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남은 건 PDF가 아니었다. 원래 알고는 있었지만 흐릿해져 있던 다섯 단계가 다시 또렷해진 것이었다.

맥락을 충분히 준다. 목표와 계획을 짠다. 일단 아웃풋을 낸다. 깎아 나간다. 자산화한다.

이 글은 그 다섯 단계를 로나가 어디까지 해 줬고, 어디서 내가 나서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1. 맥락을 충분히 준다 — 로나가 잘하는 것

로나는 처음에 묻는다.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자료가 있는지, 결과물을 누가 언제 쓰는지, 언제 끝난 걸로 칠 건지. 네 단계 인터뷰다.

나는 이전 세션에서 정리해 둔 인계 문서를 통째로 던졌다. 고객 정보, 통화에서 확정된 사실, 내가 이미 내린 결정, 산출물 위치, 남은 액션. 그러자 인터뷰가 두세 턴으로 끝났다. 로나가 잘 묻기도 했지만, 맥락이 이미 문서로 있었던 게 컸다.

여기서 첫 번째 깨달음. AI에게 맥락을 주는 건 대화 시작할 때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다. 평소에 일의 전후를 문서로 남겨 두는 것이다. 그게 있으면 어떤 AI를 붙여도 첫 턴부터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2. 목표와 계획을 짠다 — 로나가 잘하는 것

맥락이 모이자 로나는 방향을 세 개 냈다. 소개를 메일 본문에 압축할지, 기존 PDF 앞에 한 장 붙일지, 별도 파일로 만들지. 각각의 장점과 제약을 붙여서. 나는 추천안을 골랐다.

그다음 체크포인트 네 개짜리 진행표가 왔다. 넣을 내용 고르기, PDF 만들기, 메일 본문 쓰기, 초안 만들기. 각 단계에 "무엇을 하고, 왜 하고, 어떤 자료를 보고, 뭐가 되면 끝인지"가 적혀 있었다.

이 단계에서 나는 한 번 개입했다. 로나가 "소개는 1쪽 안에"라는 제약을 넣었길래 뺐다. 분량부터 정하면 중요한 근거가 잘린다. 내용을 먼저 고르고, 양이 많으면 그때 줄이자. 로나는 바로 진행표를 고쳤다.

두 번째 깨달음. 계획은 AI가 짜게 두되, 제약 조건은 사람이 검토해야 한다. AI는 안전한 쪽으로 제약을 걸고, 그 제약이 결과물의 상한이 된다.

3. 일단 아웃풋을 낸다 — 로나가 잘하는 것

첫 PDF는 반나절 만에 나왔다. 제안서 열두 종에서 소개 문구를 모으고, 기존 HTML에 붙이고, 브라우저로 인쇄하고, 쪽수와 금지어와 원문 보존을 자동으로 검사해서 보고까지. 여기까지는 로나든 평소 AI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 번째 깨달음은 짧다. 첫 판은 빨리, 검증은 기계로. 사람이 첫 판에 공을 들일수록 깎는 단계가 늦어진다.

4. 깎아 나간다 — 내가 나서야 했던 곳

여기서부터가 이번 실험의 본론이다.

첫 판을 보고 나서 나는 열 번쯤 재작업을 시켰다. 원본 제안서처럼 도식을 넣자. 목차를 넣자. 섹션 경계를 만들자. 쪽번호 정렬을 맞추자. 상태 태그를 빼자. 카드 문구는 명사형 불릿으로. 4회차 이름은 "리허설" 말고 "완성"으로.

그리고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문서에 내가 정한 적 없는 운영 방식이 들어 있던 것. "이거 어떻게 나온 결과물이니"라고 물었더니, 내 맞장구 "응"을 승인으로 읽었다고 했다. 여덟 곳을 되돌렸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 섹션에 "10분 발표 템플릿 제공"이라는 문장이 있던 것. 우리가 그런 걸 약속한 적이 없었다. "이 섹션에서 협의 안 된 거 싹 다 검토해서 보고해"라고 시켰더니 셋이 나왔고, "전체도 똑같이 검토해"라고 시켰더니 열두 곳이 더 나왔다. 협의됨, 우리 제안, 추정. 세 색으로 나누니 고객에게 나가도 되는 문장과 미팅에서 "그건 언제 정한 거죠"를 부를 문장이 갈렸다.

깎는 단계는 잘 굴러갔다. 결과물도 좋아졌다. 그런데 끝나고 세어 보니, 열 번의 재작업과 두 번의 사건 모두 내가 먼저 시켰다. 로나는 시키면 정확히 했지만, 먼저 짚지는 않았다. 한 섹션에서 세 개가 나왔으면 "전체도 볼까요"는 코치가 먼저 낼 수 있었다. 원본 제안서에 도식과 목차가 있다는 걸 이미 봤으면 "원본처럼 넣을까요"도 먼저 낼 수 있었다.

네 번째 깨달음. 깎는 단계의 질은 결국 사람이 던지는 질문의 질이다. "이거 어디서 나왔어", "여기 틀렸으면 다른 데는", "협의된 거야 우리 생각이야". 이 질문을 쥐고 있는 사람이 AI를 잘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질문의 절반은, 내가 결과물을 보고 나서야 떠올린 기준이었다. 처음부터 "원본 스타일로, 협의 안 된 건 가안으로" 두 줄만 붙였어도 재작업 절반은 없었다.

5. 자산화한다 — 남기는 것과 남기지 않는 것

끝나고 로나에게 물었다. 평소 AI로 하던 것과 뭐가 달라졌냐고. 답은 솔직했다. 도구는 같다. 달라진 건 순서와 멈추는 지점이다. 속도는 느려졌다.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요청했다. 나를 바꿀 피드백을 줘 보라고. 지킬 것 셋, 바꿀 것 셋, 만들 수 있는 장치 셋이 왔다. 출처를 묻는 습관은 지켜라. 기준은 뒤가 아니라 앞에 놓아라. 보내기 전에 세 색 분류를 한 번 돌려라. 체크리스트 파일, 승인 규칙, 발송 전 절차를 만들 수 있다.

장치는 만들지 않았다. 규칙 파일이 하나 늘어난다고 다음 문서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걸 계속 먼저 줘라. 특히 마무리 단계에 에필로그처럼."

다섯 번째 깨달음. 자산화는 규칙 파일을 쌓는 게 아니다. 이번에 무엇이 결과물을 바꿨는지를 한 줄로 남기고, 다음엔 그걸 앞에 놓는 것이다. 이번 한 줄은 이거다. "기준은 앞에, 질문은 내가."

6. 그래서 로나는

로나는 다섯 단계 중 앞의 셋을 매우 잘한다. 맥락을 끌어내고, 목표와 계획을 세우게 하고, 첫 아웃풋을 검증까지 붙여서 낸다. 이미 AI로 일하던 사람에게도 이 셋이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 준다는 점에서 값이 있다.

빈 곳은 네 번째다. 깎아 나가는 단계에서 로나는 시키는 대로 정확히 깎았지만, 어디를 깎을지는 내가 먼저 말해야 했다. 코치라는 말은 방향 없는 사람에게 방향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방향이 있는 사람이 그걸 실현하는 데 빠뜨린 걸 먼저 짚어 주는 사람이다.

깎는 과정에서 사람이 먼저 오더하지 않아도, 좋은 방법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조언을 해 줄 때. 그때 비로소 로나는 진짜 "코치"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건 로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글의 "로나"를 "AI"로 바꿔 읽어도 문장이 다 성립한다. AI를 잘 쓴다는 건 좋은 답을 받는 게 아니라, 맥락을 주고, 계획을 세우고, 일단 내고, 깎고, 남기는 다섯 단계를 내가 쥐고 있는 것이다. 그중 네 번째를 AI가 먼저 거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AI와 "같이" 일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이 부분이 AI가 잘하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발전 속도를 보면, 조만간 실현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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